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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아르 인문학 이야기/철학'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1.07.22 시간과 운명 : 필연적 인과 관계 혹은 우연적 인과 관계 (2)
  2. 2011.07.06 칼 포퍼 : 과학적 발견의 논리


순환적 시간과 영원 회귀는 운명, 숙명, 필연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에는 우연이나 자유가 들어설 자리는 전혀 없다. 니체는 우리는 이것(운명)이 무겁고 고통스럽지만 그것을 사랑해야 한다.("운명을 사랑하다")고 말한다.

운명에는 두 종류의 형태가 있기 때문에 구별할 필요가 있다. 고대로부터 운명은 자연적이면서도 종교적이다. 운명은 신들이 인간 개개인에게 부여한 확고한 개인의 몫이다. 오이디푸스를 비롯해 어떠한 비극의 주인공들도 주어진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스토아학파에게 운명은 무엇보다도 필연이다. 이러한 필연은 자연에서 원인과 결과를 이어주는 것이며, 아무것도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다. 이와 같이 태초부터 모든 것은 인과 관계로 맺어져 있다. 현재의 매순간은 지나간 모든 과거와 다가올 모든 미래를 내포하고 있다. 예언가들은 현재 나타난 징후에서 미래를 읽을 수 있다(점술, 예언술은 미래를 읽는 고대의 기술들이다).

이와 같은 냉혹한 운명 속에서는 모든 것은 이미 예견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운명론에 대항해서 "우연적 미래"를 내세운다. 자연에 있는 모든 것은 불완전하고 임시적인 초벌 그림에 불과하다. 모든 것의 결말을 결정하는 일은 인간의 행위로 돌아온다. 미래의 우연성은 우연의 여지를 남겨 놓는다. 미래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 내일 해전海戰이 일어날 것인지 아닌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오늘은 이 두 가지 가정이 모두 가능한 상태이다. 

신의 섭리가 개입되면 운명은 뚜렷하게 종교적 성격을 띠게 된다. 창조주는 어떤 목적과 구상에 따라 세계를 창조한다. 창조주는 시간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일어날 일들을 모두 "예견하고 있다"(이로부터 '섭리'라는 말이 유래된다). 섭리는 신의 전능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예언자들은 신의 메시지를 알려준다. 그러나 창세기 때부터 결정되어 있는 이러한 시간은 인간의 자유와 상치된다. 이런 이유로 라이프니츠는 (변신론)에서 신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를 화해시키려는 시도를 감행한다. 

흄과 인과 관계란 우연적인 시간의 연속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운명과 필연을 실추시킨다.
우리가 '원인'과 '결과'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경험 속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규칙적인 방식으로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구름이 몰려오면 흔히 비가 뒤따른다는 것을 우리는 습과적으로 보아왔다. 그래서 우리는 구름이 비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름에 비가 뒤따르지 않는 일도 일어나며, 불같이 뜨거운 날이 구름을 몰고 올 수 있다는 것도 상상할 수 있다. 선험적으로 불 때 어떤 원인이 반드시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원인은 결과를 만들어낼 어떤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결과'라고 부르는 사건보다 원인이라고 부르는 사건이 대체로 먼저 나타났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과관계란 규칙적인 시간의 연속일 뿐이다. 반대되는 경우도 언제나 가능하기 때문에 여기에는 필연성이 없다.  
- 바칼로레아 pp.99~100

***
우리의 자유의지는 운명의 소용돌이에 부딪쳐 자유의지의 상실을 경험할 수 있다. 과연 인간의 삶에 우연과 필연 이것의 조화는 어디에서 멈추게 될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인간의 어떤 특성이 우연과 필연에 묶이게 하는 것일까? 사람과의 만남을 예를 들면 그것은 우연인가 필연이가... 그리하여 운명론으로 가게 하는 것은 과연 옳은 판단인가? 그렇지 않다면 어떤 연역관계를 설정해야 하는 것인가? 인간이 습관적으로 사고하는 패턴으로 그토록 행복을 염원하는 삶에 무리수를 발견하게 만드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이 또한 운명론인가... 어쩌면 인간 내면적 습성으로 자유 의지를 가지는 것이 불가능한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운명론에 맞설수도 없고 필연적 세계관에 맞서는 것 또한 운명론의 귀결이라면 흄이 말한 시간의 연속성에서 답을 찾아 보면 우리가 사고하는 성향의 모순에서 삶의 형식이 결정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Posted by 보부아르 보부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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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ames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2.10.03 22:59

    혹시 <바칼로레아>라는 책의 출처를 알 수 있을까요?

  2. 보부아르 보부아르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3.12.17 14:51 신고

    Baccalaureate: 프랑스의 논술형 대입자격 시험으로 이를 대비한 논술 대비 철학 수험서 입니다.
    저자는 스테판 비알이고, 이지북에서 출판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참'과 '거짓'의 개념을 초시간성에 연관시킨다. 어떤 진술에 대해, 어제는 그것이 완벽하게 참이었는데 오늘은 그것이 거짓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은 아니다. 어제 우리가 참이었다고 평가한 진술을 오늘 거짓이라고 평가한다는 것은, 우리가 어제 잘못 판단했다는 것을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다. 즉 어제도 그 진술은 거짓-초시간적으로 거짓-이었는데 우리가 실수로 그것을 '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전제한다.

여기서 진리와 확증의 차이가 뚜렷이 나타난다. ... 어떤 진술에 대해 우리는 그것이 그 자체로 (그것은 '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확실하다'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그 진술이 어떤 기본적인 언술 체계, 즉 어떤 한정된 시간 내에서 수용될 수 있는 언술 체계 내에서 상대적으로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어제까지 어떤 이론이 갖고 있던 확실성"이 "오늘 어떤 이론이 갖고 있는 확실성"과 논리적으로 동일하지 않다.

***
확실성에 대한 지나친 신념 그리고 참에 대한 불변의 진리로의 대치는 '참' 넘어 판단하고 보아야 할 '참'을 보지 못하고 성장을 이루었다고 말하는 이가 있을 수 있다. 포퍼의 글에서처럼 우리는 쉽게 자주 참과 거짓을 바뀌는 입장에 놓이기도 한다. 그래도 그것으로의 문제점을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순간은 참이나 지나고 보니 거짓임을 알게 되었는데 어찌하란 말인가라고 말이다. 과연 우리는 그 순간 참이라고 생각하였는가?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 참이라 말하는가? 상대적 확실성으로 말할 수 밖에 없는 인간 인식의 한계는 자만으로 끌어 올릴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나의 확실성과 타인의 불확실성을 매도하며 나의 성공과 확실함만을 진리의 증거와 토대로 바라보고 살아가는 나약한 인간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반증 가능한 사실에도 종종 멈추는 인간의 지혜를 얻기를 생각해 본다.
Posted by 보부아르 보부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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