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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내려놓기

- 법륜 지음

 

 

 

 

자신이 일으킨 생각에 사로잡혀

 

이렇게 사람들은 자신이 일으킨 생각에 사로잡혀 옳다 그르다 모양 짓고 그 모양에 집착해서 온갖 괴로움을 스스로 만듭니다. '내가 보기에 ...' 하지 않고 이미 객관화시켜 자기 마음대로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을 정해버린 것입니다. 이때 한 생각 돌이켜서 이 사로잡힘에서 벗어나면 모든 괴로움과 얽매임은 즉시 사라집니다.

 

괴로움도 속박도 모두 내가 만들어낸 굴레입니다. 이 굴레를 벗어나는 길은 문제의 원인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고, 내 마음이 지은 것이고, 그것 또한 실체가 없는 것임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 점을 명심하고 정진해서 행복과 자유를 얻도록 수행해 나가야 합니다.

 

p. 129

 

법륜 스님의 책을 접하며 아주 간결하고 쉬운 문체로 삶의 여러 인과관계를 풀어 놓은 것처럼 생생하게 책을 보게 되었다. 모든 글의 마무리를 바라보며 불교가 말하는 여러 삶의 진리는 분명 이유가 어우러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의 삶이 주는 고통과 그 원인으로 우리가 끝없이 고뇌하는 그 길에서 어쩌면 진정으로 자유를 찾아야 하는 것은 내려놓기에서 시작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Posted by 보부아르 보부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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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대로             
                                    : 처진 달팽이

 나 스무살 적에 하루를 견디고
 불안한 잠자리에 누울때면

 내일 뭐하지 내일 뭐하지 걱정을 했지

 두 눈을 감아도 통 잠은 안오고
 가슴은 아프도록 답답할 때

 난 왜 안되지 왜 난 안되지 되뇌었지
 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될 수 있다곤 믿지 않았지
 믿을 수 없었지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할 수 있단 건 거짓말 같았지
 고개를 저었지

 그러던 어느날 내 마음에 찾아온
 작지만 놀라운 깨달음이
 내일 뭘할지, 내일 뭘할지 꿈꾸게 했지

 사실은 한번도 미친듯 그렇게
 달려든 적이 없었다는 것은
 
생각해봤지 일으켜세웠지 내 자신을


 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될 수 있단 걸 눈으로 본 순간
 믿어 보기로 했지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할 수 있단 걸 알게 된 순간
 고갤 끄덕였지

 마음먹은 대로 생각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될 수 있다는 걸
 알지 못했지 그땐 몰랐지

 이젠 올수도 없고 갈수도 없는
 
힘들었던 나의 시절 나의 20대
 
멈추지 말고 쓰러지지 말고 앞만
 보고 달려

 너의 길을 가
 주변에서 하는 수 많은 이야기
 그러나 정말 들어야 하는 건
 내 마음속 작은 이야기

 지금 바로 내 마음속에서 말하는 이야기
 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될 수 있다고, 될 수 있다고
 그대 믿는다면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도전은 무한히 인생은 영원히
 
 말하는 대로

 ***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는대로는' 작은 사랑과 삶 넘어 세상에 잠시 쉴 수 있도록 만드는 자리를 두는 것 같다.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의 집착과 형식에 보이지 않는 너머에 있는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도 이유도 찾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진정으로 가슴 깊이 들어가서 보아야 할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 세상 속 세상인지도 모른다. 그것의 가장 가까운 거리는 자신의 마음일 것이다. 자아에 대한 방황과 자아의 상실은 우리의 꿈꾸는 것을 멈추게 만드는 것 같다. 이 시대에 다시 꿈을 꾸고 싶다.   

Posted by 보부아르 보부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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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착같이 일해도 즐기는 사람 못 당한다."

*
이경규는 인생이란 기획된 삶이 아니라고 말했다. 자신도 겨우겨우 지금까지 왔다고 했다. 기대했던 프로그램이 잘 안돼 고민한 적도 많았다고 한다. 그런 자신이 그래도 지금까지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성실함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일본 연수 1년을 제외하면 24년의 방송 기간 동안 한 번도 녹화를 펑크 낸 적이 없고 방송 미팅조차 늦은 적이 없어요. 성실이 제 삶의 원동력이죠."
이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자산이라는 말도 곁들였다. 부산의 미군 부대에서 45년간 근무한 그의 부친은 '가장 성실한 직원'으로 뽑혀 부대에서 발행하는 잡지 표지 모델이 되기도 했다.

** 
하지만 이경규는 성실하게 하되 방송 자체를 임할 때는 너무 열심히, 악착같이 하면 안 된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대충대충 놀면서 즐기며 일해야 보는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너무 열심히 한 녹화 장면은 편집 때 잘라 달라고 담당 피디에게 부탁한다. 최선을 다하는 건 뒤에서 보여 주면 된다.

***
"아마추어들로 구성된 조기 축구를 보면 정말 열심히 뛰지만 악착같이 애쓰는 모습을 보는게 힘들 때가 많아요. 반면 프로들이 뛰는 영국 프리미어 리그 축구는 아주 매끄럽습니다. 복싱 신인왕전은 4라운드 내내 탈진할 정도로 열심히 싸워요. 보기 무서울 정도죠. 하지만 노련한 중남미 프로 복싱 세계 타이틀전은 대충하는 듯하지만 정말 잘해요."
그는 방송을 할 때도 늘 이런 생각으로 임한다고 한다. 부담감을 함께 떠안겨 주는 웃음은 진짜 웃음이 아니라고 말이다.                                                                     pp.110~113

제목에 이끌려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유재석과 강호동을 평소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 상태라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유재석과 강호동은 단점을 장점으로 특화시키고 장점을 단점으로 만들며 자신의 입지를 아주 잘 구축하는 스타일이다. 그런데 이경규편에 멈추게 된 것은 축구와 복싱의 예가 내가 살고 있는 삶에 작은 자극을 남겼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프로가 되고 싶지만 아마추어의 삶을 프로의 삶이라 착각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열심히 무엇인가 전투적으로 해야 살아 남는다고 생각하던 지난날에 이제 나이를 더하니 조금씩 지쳐가게 된다. 열심히 전투적으로 해도 그렇지 않은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위 여유라는 것을 가지지 못한 것이 늘 나를 불안하고 두렵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 이경규의 태도는 한때 정말 위기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또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넘기며 더욱 견고한 성을 만드는 노련함을 보니 그의 말이 가슴에 남는다.
우리는 최고보다 최선을.. 이라는 말을 하곤 한다. 돌이켜 보면 이 말들에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과 사활만을 걸고 달리지 않았는지 묻고 싶다. 그렇게 달리기에만 집중하면 무엇을 향해 달리고 왜 달리는지 그리고 그것으로 나의 행복이 담보 되는 것인지 등등... 이러한 것에 대한 집중력을 잃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느슨하게 하는 것 같지만 그 안에 치밀함과 계획된 상황 전개는 분명 뛰는 것으로 주변의 집중력을 흐트리는 것보다 좀더 지혜를 찾는 길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뛰기만 열심히 하면 무엇인가 한 것 같은 착각을 넣어 주지만 그 내실을 다지는데는 분명 부족함이 있으리라 본다.
느슨함으로 즐기는 여유... 우리의 인생의 봄날은 오늘..이고 지금..이기에 여기서 부터 조금은 틈을 내어 내가 위치한 상황에 멋을 부릴 줄 알아야 할 것 같다. 나를 너무 코너에 몰아 넣지 않는 여유를 가져야 할 것 같다.
유재석의 글이 기억난다. "언젠가 많은 분들의 사랑과 인정을 받는 날이 온다면 정말 무명시절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제가 불교 신자인데요. 밤마다 기도했어요. ... 좋아도 너무 기뻐하지 말고, 안 좋아도 너무 슬퍼하지 말자고요. ... pp. 67~68
뛰기에 급박하여 결승점에 조금이라도 일찍 당도하면 그 기쁨에 환호를 외치는 어리석음도 조금 늦게 도착한 아쉬움과 좌절감으로 깊은 슬픔의 어리석음도 가져서는 안 될 것 같다. 그것은 하나의 과정이지 인생의 결승점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뛰기와 함께 부드러움과 유연함을 함께 가지고 뛴다면 자연과 인생의 아름다움을 가슴에 남길 수 있으리라 본다. 
         
    


Posted by 보부아르 보부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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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현실화시키는 상상력 훈련
꿈을 현실화시키려면 상상 속에서 그것이 이루어진 것을 자주 바라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를 우리는 상상력 훈련이라고 부를 수 있다. 맥스웰 몰츠는 그의 저서 '성공의 법칙'에서 그 훈련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훈련할 수 있을지 알아보기로 하자.
우선 혼자 있거나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골라서 매일 30분 정도 투자하라. 그리고 가능하면 긴장을 풀고 편안한 마음을 갖도록 하자. 그런 다음 눈을 감고 상상력을 훈련해 보도록 하자.
우리는 상상 속에서 우리의 정신적 이미지를 가능한 한 실제 경험에 근접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부적인 사항, 시각, 소리, 물체 등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상상이 생생하고 상세하다면, 상상력 훈련은 우리의 신경 시스템에 실제 경험과 동일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다음으로 기억해 두어야 할 중요한 점은 적절하고 성공적이고 이상적으로 행동하고 반응하는 자신을 상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수줍음이 많고 소심한 성격의 사람이라면 사람들 사이에서 편안하고 침착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상상하라. 만일 특별히 어떠한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거나 불안을 느낀다면, 자신감과 용기를 가지고 차분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상상하라. 그리고 자신의 그런 행동 때문에 개방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변한 자신의 모습을 즐기자.
이러한 훈련은 우리의 중뇌와 중추 신경계에 새로운 기억이나 저장된 데이터를 심어 준다. 그것은 또한 새로운 자아의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게 도와준다. 한동안 이러한 훈련을 한 후에는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더라도 자동적이고 자발적으로 이전과 다르게 행동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놀라게 될 것이다. pp.143~144
- 무지개 원리 중
 
Posted by 보부아르 보부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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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 같으면 '불행'이 될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행복'으로 전환시킬 줄 알았던 사람이 대철학자 소크라테스였다. 그는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행복의 기회를 발견할 줄 아는 긍정적 발상의 주인공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는 말이 많고 성미가 고약했다. 사람들이 묻기를 "왜 그런 악처와 같이 사느냐"고 하니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마(馬)술에 뛰어나고자 하는 사람은 난폭한 말만 골라서 타지. 난폭한 말을 익숙하게 다루면 딴 말을 탈 때 매우 수월하니까 말이야. 내가 그 여자의 성격을 참고 견디어 낸다면 천하에 다루기 어려운 사람은 없겠지."
또 한번은 부인의 끊임없는 잔소리를 어떻게 견디느냐고 사람들이 물었다. 그랬더니 소크라테스는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도 귀에 익으면 괴로울 거야 없지"라고 대답하며 웃더란다.
어느 날은 부인이 소크라테스에게 잔소리를 퍼붓다가 머리 위에 물 한 바가지까지 휙 끼얹었다. 그래도 소크라테스는 태연히 말했다고 한다.
"천둥이 친 다음에는 큰비가 내리는 법이지."

보통 사람 같으면 크산티페의 고약한 언동 때문에 같이 감정이 폭발하여 화병이 들고도 남을 일이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재치 있게 긍정적으로 생각함으로써 아예 분노라는 감정을 생기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이 생각의 힘이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정 이면에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생각을 긍정적으로 다스리면 감정은 그에 따라갈 수 밖에 없다. pp.72~73

-무지개 원리 中
Posted by 보부아르 보부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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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대왕이 이스라엘에 왔을 때 어떤 유태인이 대왕에게 물었다.
"대왕께서는 우리가 가진 금과 은이 갖고 싶지 않으신지요?"

그러자 알렉산더 대왕이 대답하기를,
"나는 금과 같은 보화는 많이 가지고 있어, 그런건 조금도 탐나지 않소. 다만 당신들 유태인들의 전통과 당신들의 정의는 어떤 것인지 알고 싶을 뿐이오."
하고 말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곳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두 명의 사나이가 어떤 일을 상담하기 위하여 랍비를 찾아갔다. 내용인즉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넝마더미를 샀는데, 그 넝마 속에서 많은 금화가 발견되었다. 그래서 그는 넝마를 판 사람에게,

"나는 넝마를 산 것이지 금화까지 산것은 아니요. 그러니 이 금화는 마땅히 당신 것이오."
라고 말했다. 그러나 넝마를 판 사람은 그것을 산 사람에게,
"나는 당신에게 넝마더미 전부를 판 것이니, 그 속에 들어 있는 것도 모두 당신 것이오."
라고 말했다. 그러자 랍비는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 판정을 내렸다.

"당신들에게는 각기 딸과 아들이 있으니, 그 두 사람을 서로 결혼시킨 후, 그 금화를 그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옳은 사리일 것이오."

그리고는 알렉산더 대왕에게 물어보았다.
"대왕님, 당신의 나라에서는 이런 경우 어떤 판결을 내리십니까?"

그러자 알렉산더 대왕은 아주 간단하게 답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두 사람을 함께 죽이고 금화는 내가 갖소.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정의요."
                                                                                                                  -탈무드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정의란 무엇일까? 이 물음은 현대의 화두이며 미래의 화두로 자리할 것이 분명하다. ebs에서의 마이클샌델의 강의는 억지스러운 것이 없지 않지만 정의에 대해 잠시 멈추게 하는 것으로 의미 있다 하겠다. 
옳음과 정의의 문제가 충돌할 경우 옳음이란 인간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능력, 칸트의 경우 선험성을 말해도 되겠다. 그것으로 즉각적으로 옳음을 구분해 낼 수 있는 능력을 인간이 갖고 있다면 정의란 그 옳음을 지켜 나가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현대에 이 옳음과 정의를 놓고 우리가 이끌어 나가야 하는 것의 이해관계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우리의 선험적 능력에 호소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Posted by 보부아르 보부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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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임금님에게 외동딸이 있었는데, 그 따님이 큰 병이나 눕게 되었다. 의사는 세상에 둘도 없는 신통한 약을 먹이지 않는 한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고심하던 임금님은 자기 딸의 병을 고쳐주는 사람을 사위로 삼는 것은 물론 다음번 임금의 자리까지도 물려주겠다고 포고문을 붙였다.
당시 아주 외딴 시골에 삼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맏이가 망원경으로 그 포고문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삼형제는 그 사정을 딱하게 여겨 임금님 외동딸의 병을 고쳐보자고 의논하였다.

 

삼형제 중 둘째는 마법을 쓰는 융단을 가지고 있었고, 막내인 셋째도 마법을 쓰는 사과를 가지고 있었다. 마법 융단은 아무리 먼 곳이라도 주문만 외면 잠깐 사이에 날아갈 수 있었고, 마법 사과도 먹기만 하면 어떤 병이고 감쪽같이 낫게 하는 신통력이 있었다.

이들 삼형제가 서둘러 마법 융단을 타고 궁전에 도착하여 공주한테 마법사과를 먹게 하자 공주의 병은 정말 신통하게도 말끔히 낫게 되었다. 온 백성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기뻐했으며, 임금님은 큰 잔치를 벌이고 사위이자 다음번 임금이 될 사람을 발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삼형제들은 서로 의견이 달랐다. 이 중 큰 형이 말하기를 '만일 내 망원경으로 포고문을 보지 못했다면 우리는 공주가 병으로 누운 사실도 몰랐을 게야'라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둘째는 '만일 날아다니는 내 양탄자가 없었다면 이 먼곳까지 어떻게 왔겠느냐?'고 했고, 셋째는 만약 여러분들이 임금의 입장이라면 과연 삼형제 가운데 누구를 사윗감으로 정하겠는가?

여기에서는 사위이자 다음번 왕위를 이을 사람은 마법 사과를 가진 셋째이다. 왜냐하면 망원경을 가진 첫째는 그 망원경이 그대로 남아있고, 둘째도 타고 온 융단이 그대로 남아 있으나 셋째의 사과는 공주가 먹어버려 없어졌지 때문이다.

셋째는 임금의 외동딸을 위해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주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탈무드>에서는 남에게 도움을 줄 때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탈무드


탈무드의 지혜는 잊고 있던 우리의 삶을 돌아 보게 한다. 마법의 사과를 가진 셋째는 과연 그것을 내어 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분명 내어주는 자체를 잊지 않았을까 싶다. 처음부터 마법의 사과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는 어떠한가?
철저한 계산과 상황 판단의 실리를 중시하며 타인의 마법의 사과를 잃어버린 자신의 사과였다고 말하는 이도 분명 있으리라 생각한다. 
 
  

Posted by 보부아르 보부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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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生의 시작과 끝에 가족이라는 단어는 가슴 속 애잔함을 표현 하기에 부족하다. 국어사전적 의미로 가족은 ‘한 문화권에서 생물학적인 관계나 결혼, 입양, 기타 관습 등으로 친척의 지위를 얻은 친족 집단의 일부’라고 정의 내리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경직된 정의에 회의감이 든다. 물론 객관적 지표와 과학적 근거에서 정의 내리기를 하겠지만 우리가 흔히 쓰는 ‘우리 가족’이나 ‘한 가족’ 등의 접두사가 붙어야 가족이라는 단어가 살아나는 것 같다. 물론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관행과 불필요한 감정의 선을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삶의 시작과 끝은 오로지 하늘의 몫이다. 그 과정에서 주어진 가족은 하늘과 땅의 연결 고리의 하나로 자연과 인간의 궁극적 지향의 완성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일생을 통해서 선택이라는 것을 하고 그럴 수 있는 권리가 있기를 원한다. 하지만 생의 시작을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작된 관계로 인해 이를 긍정하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겪는 경우가 허다하다.

 

 주인공 정은 역시 이러한 고뇌 속에 빠져든다. “난 처음부터 아빠의 딸이길, 이 집에 태어나길 원치 않았다. 교도소에서 지내는 동안, 자유로움은 없었지만 집에서 해방될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날 기다리고 있을 정환 이를 생각하면 맘이 설레 인다. 집에 가긴 가야 하는데, 가장 맘에 걸리는 건 바로 아.버.지.다.” 아이러니하다.

 

 나 또한 어릴 때 무엇이 그리 못 마땅해서인지 부모님께 반항을 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에 생각하면 웃음 밖에 나오지 않지만 그때는 나름 심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든다. 정은은 과연 자신의 선택권으로 원하는 곳에 태어났다면 부모를 부정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모든 조건과 배경이 좋아도 인간의 영혼은 만족을 모르는 존재인 것 같다. 이것을 부정적으로 보자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강한 집념과 욕망으로 인류의 진보가 가능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딜레마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 딜레마 끝은 영화에서 전해지는 깊은 여운과 삶의 과정을 통한 나를 재조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 인생의 궁극적 목적으로의 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뿌리를 모를지언정 뿌리 자체를 부정할 수 없듯, 삶이 진정으로 전하고자 하는 것은 가족이라는 단어에 숨겨진 수수께끼가 아닌가 한다.

 

 우리는 처음에 자식으로 다음엔 부모로의 자연스러운 변화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 또한 처음 부모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어린아이는 우리 부모가 더 많은 것을 해주고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주길 원한다. 하지만 부모 또한 그 역할이 처음이기에 자식이 다 컸을 즈음 부모의 역할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처음’이라는 것은 아무리 그 대상이 부모일지라도 두려운 것은 사실이다.

 

 영화에서 아버지는 “해선 안 될 말로 정은 이에게 또 다시 상처를 줘버렸다. 정은이가 제발 그 위험한 놈들과 어울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저 녀석, 왜 그리도 내 맘을 모르는 걸까? 내가 그 놈들한테서 정은이와 정환이를 지켜낼 수 있을까.. 아무런 힘없는 내 자신이 부끄러울 뿐이다. 미안하다, 정은아.” 아버지는 부끄럽다고 말한다. 하지만 부모의 사랑은 세상을 부끄럽게 만들지언정 세상 어떤 빛보다 아름답고 고귀하다. 우리가 부모가 되고 나면 이것을 깨닫게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깊은 사랑의 샘을 쉽게 만나긴 어렵다. 하지만 영화에서 아버지는 말한다. 세상의 모든 부모를 대신해서 말이다. 무엇보다 母情보다 특별한 사랑으로 아버지는 온 몸으로 외치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을 깨닫기에 자식은 세상이라는 거친 파도와 먼저 인사를 해야 한다.


 영화에서 보여 주는 가족은 감정의 쇠사슬을 스스로에게 옭아 메며 가슴 깊이 가족의 사랑을 도둑질하려 한다. 시작과 끝이 하나로 연결된 가족이지만 그 속에서 자신을 지불해야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 가족의 구조이다. 현대사회는 가족이라는 의미가 참으로 많이 변하고 있고, 그 유형도 다양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한 가지가 있다면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가족애와 정일 것이다.


 부모님을 생각하며 눈시울을 붉힌 경우가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또한 형제ㆍ자매를 떠올리며 눈시울을 적신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다른 인간관계와 달리 가족에게 전해지는 감정의 고리는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 뜨거운 무엇인가 가슴에서 솟구치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신은 우리의 깨달음의 순간을 너무 늦게 주는 것은 아닌가 생각에 잠겨본다. 어느 시인의 글귀처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가슴 뭉클한 글귀하나가 시간이 더해지고 나이가 더해지면서 선명해지는 것이 너무도 억울하고 분할 때도 있다. 나의 모자람과 부족함에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으며 잃어버린 삶의 아픔을 이 영화를 통해 곱씹어 보게 된다. 정은 또한 그러 했으리라 본다. 하지만 분명 그 속에서 아픔을 감싸고 함께 웃을 수 있는 용기는 사랑이라는 버팀목으로 가능하고 그것으로 더욱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것 같다.


 사람의 모습이 제 각각이듯 삶의 모습도 모두 다르다. 물론 부모와 자녀의 모습도 다르다. 우리는 부모와 자녀를 보편적 틀에 가두어 자유와 사랑의 표현에 인색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매 순간 말 한마디와 눈빛 하나가 가족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고 진실을 읽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가족’이라는 영화는 많은 선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고 가족을 부정하려 하지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가족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 예를 들면 부모ㆍ형제ㆍ 타고난 性은 변화시킬 수 없듯이 이것을 수용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의 자세가 절실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멈춘다. 그것만이 가장 중요한 것을 잃지 않고 얻기 위한 근본인지도 모르겠다.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며 그 나머지 부분은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내며 살아야 할 것 같다.


 우리 삶이 보여 주듯이 가족은 따뜻한 공간과 감정을 가지게 만들지만 그 안에 희생과 인내의 아픔이 공존함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네모는 네모만 좋아하고 동그라미는 동그라미만 좋아하고 세모는 세모만 좋아하는 세상이 아닌 이들이 모두 섞여서 이룬 울타리가 아름답고 그 안에 찌그러진 동그라미, 찢어진 세모, 구멍난 네모의 만남이라도 가 족의 울타리에서 사랑이라는 신비의 약으로 치료를 할 수 있는 그런 것을 떠올리게 만든 영화였다.

                 

 5월 달력 속에 부모와 자녀의 날을 각각 정하고 있는 것처럼 가정의 달에 부모와 자녀의 따뜻한 말 한마디를 늘리고 표현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는 것 같다. 가족으로 인해 아픈 마음은 다른 무엇보다 쓰리고 아린 것 같다. 그래서 주인공들 또한 상처를 잊으려 발버둥치는 모습에 연민을 느끼게 만든다.


 영화에서 보이듯 부모들은 자식에 대한 사랑에 조건이 없으니 이를 무엇이라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런 사랑에 눈으로 보이는 상처뿐만 아니라 가슴에 난 상처 또한 기꺼이 감수하는 아버지의 사랑은 자식을 넉넉한 품으로 안으며 깨닫게 만드는 교훈을 남기는 것 같다. 아쉽다면 보다 서로에게 진실한 마음을 표현하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한다. 아픔을 가슴으로만 간직하고 희생하는 모습이 고귀하고 아름답지만 안타까운 마음을 지울 수는 없는 것 같다.       


 우리는 종종 타이밍을 놓치곤 한다. 죽음의 갈림길에서 부모에게 자식은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 부모와 자식 간에 놓인 수많은 명언들이 참으로 가슴에 와 닿게 만든 영화이다. 나 또한 뒤돌아보면 가족의 소중함을 잊고 지낸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에 와 있다. 우리는 소중한 것을 너무도 늦게 깨닫는 실수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산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이 가족이거늘 서로에게 작게 또는 크게 상처를 반복하여 만드는 삶을 돌아보며 가족이라는 단어에 애틋함을 심어 본다.


 부모를 떠나 결혼이라는 것을 하고 보니 내겐 가족이 늘어나며, 부모의 따뜻한 울타리를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다. 영화의 아버지는 무뚝뚝하다지만 큰 사랑을 담고 있는 것처럼 산을 떠나 있으면서 산이 움직였다는 억지를 자식들은 부리는지 모르겠다.

 

 영화가 진부한 스토리를 한국적 정서에 엮어 나가는 것이 다소 거슬리긴 했지만 그 안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시도라는 생각을 하기로 했다. 영화 ‘집으로’가 떠올랐다. 할머니와 손자의 잔잔한 정의 교류가 가슴 뭉클하게 만드는 그런 것이 영화 ‘가족’에서도 전하고자 했음이다.


 가장 가까운 존재이지만 가장 멀게 느껴지는 가족을 한 번쯤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우리는 마음의 거리를 좁히며 이 시대에 퇴색된 가족을 재조명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일상적이지만 결코 일상적이지 않은 가족이라는 영화가 담고자 한 진한 감동은 가슴에 담아서 말이다.


Posted by 보부아르 보부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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